저보다 커다란 가방을 끌고도 애써 불안한 표정 감추며 태연한 듯 공항출국대를 나서던 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
남들은 엄마와 함께 외국에 가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여러가지를 배우고 오는 유학생활이 일상적인 시절이었지.
온통 낯선 문물, 생소한 환경, 이질적인 문화, 언어장벽 등등 열한살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엔 널려 있는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아빠는 부모의 욕심으로 좀더 좋은 환경의 교육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행여 혼자 가서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이게 과연 옳은 방법인가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지만, 우선은 너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싶어 네게 물었을 때 어찌 그리 태연히, 그리고 흔쾌히 수락하던지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구나.
직장을 가진 엄마를 둔 덕(?)에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그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며 캐나다 하숙집에서 개구지기만 하다던 동급생 남자애를 꽉 틀어쥐고, 학교에서도 한 번도 열등한 적 없이 많은 현지 친구들을 사귀고 우정을 쌓고 하던 모습.

어린 녀석이 당돌할만큼 당당하게 힘든 시간을 견디고 돌아왔을 때 아빠는 "우리 딸이 이제 품안의 자식만은 아니구나, 혼자 견뎌야 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잘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꼬마가 혼자서 유학길에 올랐는데 돌아올 때는 반쯤 어였한 여성이 돌아온거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성인이 될 준비를 위해 인생을 잠시 담보한다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한 학기를 지내고 많은 걸 느껴서 방학조차 반납하고 이른바 '세속과의 인연을 끊어보겠다' 했을 때 아빤 참 슬펐다.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네 처지가 슬픈게 아니라, 이런 일을 일상적인 일로 만드는 현실이 아빠의 마음 한켠에 넣어둔 슬픔상자를 열어버렸다. 방학 하면 최소한의 공부만 규칙적으로 하라고 하고 나머지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어디든 같이 다니고, 무어든 하게 해주면서 평생을 아빠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싶었었다. 어느날 갑자기 엄마한테 기숙학원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의 생각을 접어야 했고, 또 언제 가족이 다 함께 부러운 추억을 만들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싶어 아쉬웠단다.
하지만 아빠가 늘 생각하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너 스스로의 결정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지금처럼 선택의 갈림길에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한번의 결정이 인생을 전환시키는 경우도 있고, 반복되는 선택이 삶을 점점 윤택하게 하기도 하고 피폐하게 할 수도 있단다. 이번에 너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를 평가하고 부족한 점을 어떻게든 보충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걸로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마치고 아빠 앞에 다시 전보다 훨씬 많이 큰 채원이가 서 있을거라는 흐뭇한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공부에만 너무 매달리지는 말고, 단기에 무언가를 다 이룰거라는 기대나 욕심도 갖지 말고, 그저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끈기있게 공부를 해 나갈 수 있는 습관만 기를 수 있다면 이번 너의 결정에 대해 200%를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오래전 열한살 어린나이에도 다 이겨내고 아빠앞에 당당히 섣던 너 이니까, 다시 만나는 날에는 여전히 아빠의 딸이면서 한편으론 여인으로 성숙해지는 채원을 만나자. 늦은 밤까지 건강 해치지 말고 좋은 꿈꾸며 잘자거라. 규칙적인 생활을 할테니까 건강에 대한 염려는 기우일 것으로 생각한다. 당분간 안녕 아빠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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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아빠 잘놀고 엄마 잘크고 동생은 부산 외가에 납시셨고 견공께서는 기체우일양만강 하시다.
      2.택배는 월 2회 정도로 제한하자는 너의 모친의 말씀이 계셨다.

      3.아빠가 무더위에 머릿속에서 흐르는 땀을 견디지 못하고 펌 했음

      4.산타가 귀와 꼬리만 남기고 올백스타일로 변했음